하루는 가평의 00초등학교에 직장민방위대 정기검열을 위한 비상소집이 이루어졌다. 한여름 여명과 함께 05시 30분 검열을 위해 학교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일부 직장 민방위 대원들이 도착해 있었고 대원들이 속속들이 집합하고 있었다. 민방위 대원들은 여기가 학교 직장민방대 인지라 모두가 선생님들이었고 일부 학교 행정직 직원이 조금 있었다.

나는 아직 군입대 전이어서 군대 경험이 없었지만 담당업무가 업무인지라 군대식으로 점검을 해야했다. 소집후 10분쯤 지나 소집점검을 시작하였는데 출석첵크 그리고 복장과 두발, 신발착용 과 민방위 모자착용 여부 등을 꼼꼼히 점검하였다.

그날 점검하는 대열 속에는 각선미가 늘씬하고 눈망울이 아주 시원하게 생겨 「초원의 빛」의 나탈리우드 같은 여선생님이 끼여 있었다. 왠지 내 눈길이 그 여선생님을 향하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미니스커트에 슬리퍼 차림으로 민방위 비상소집훈련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나는 호출했다.

“오른쪽 3번째 민방위 대원님, 앞으로 나와보세요. 미니스커트에 슬리퍼 차림으로 비상소집하다니 복장 불량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하여 난 그 여선생님을 집으로 돌려보내버렸다.
 

비상소집은 민방위 정규 교육훈련시간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 연간 교육훈련 이수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해당 민방위대원은 재교육을 이수해야 하고 직장민방위대 대장인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서면경고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비상소집훈련을 치른 이틀 후 나에게 전화 한통화가 걸려왔다.

“이우인 교육훈련관님, 00초등학교 박선생입니다. 한번 찾아 뵐 수 있을까요?” 비상소집 때 미니스커트와 슬리퍼를 착용한 여선생님인 듯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으며 비상소집 교육 이수 조치를 어떻게든 이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민방위 수첩에 교육훈련 이수란에 교육훈련 필이란 도장을 찍어야만 교육훈련 이수가 인정되었는데 그 도장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담당이 바로 필자였으니 막강하다면 아주 막강한 직책이었다. 박선생님은 닭귀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였다.

앞으로는 정복차림에 훈련화를 신고 비상소집에 임 할테니 교육필 도장을 찍어달라고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대도 나는 국가관이 부족한 박선생님 같은 분은 민방위 교육을 더 받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호되게 야단쳤다.

그러자 박선생은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 예쁜 얼굴이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나는 미안하고 난감해졌다. 한 달이 지나고 상황이 진전되어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2살 연상이고 본가는 인천인데 첫 발령을 가평으로 받았다는 것을.

그 후 나는 짜장면 집에서 그녀와 점심을 먹고 북한강 뚝방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하였다. 그 데이트가 교육필 도장을 찍어준 댓가인지 자연스런 사랑의 감정인지 아직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해 6월 나는 군대 영장을 받았다. 가평역에서 입병열차를 타고 증평훈련소(1980.6.19.)에 도착했다. 신병훈련, 제식훈련, 각개전투, 유격훈련, 얼차레 등등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은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새가 새장에 갇혔으니 오죽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훈련도중 10분간 주어지는 휴식시간이면 고향의 부모님과 친구들, 가평군청 직원들, 제사공장 아가씨들 그리고 청순한 초등학교 박선생님의 얼굴이 문득문득 스쳐 지나갔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조영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일부

신병훈련을 마치고 부산군수사령부에 자대배치 받아 그 당시 조영필의 노래로 유명한 동백섬이 보이는 해운대 탄약창에서 소총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군대생활을 돌이켜보면 이병 때 고달픈 시절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아주 행복한 군 생활이었다. 상병 계급을 달면서 칠성부대 부속 장성아파트에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연병장 아침구보 대신 주말이면 해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조기축구를 하고 군대밥 대신 짜장면을 먹고 막사주변 청소대신 해운대 모래사장에 산책나가고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안월동 서울 깍두기 집을 제 집 드나들 듯 활보하였다.

한마디로 준장 다음에 소장, 소장 다음에 중장, 중장 다음에 대장, 대장 다음에 병장이라고 하였던가? 5 대 장성의 하나인 화려한 병장생활을 영위하였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그립고 아쉽다. 남자들은 누구나 군대 이야기를 자주 한다. 특히 남자들은 술자리에서 밤을 세워가며 군대이야기를 되풀이 하는데 그것은 청춘의 열정에 대한 예찬과 가버린 젊음에 대한 연민이다.

지난 여름 무직한 목소리의 전화 한통을 받았다. “이병장님, 저 모르시겠습니까? 저 임병두니다.” “누구요?” “ 임병두 상병입니다.” 아! 임병두, 내가슴이 덜컹거렸다.

나는 아린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냐하면 군 복무시절 그 후배만큼 사고뭉치로서 구타와 고문관으로 악명 높았던 후임병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고 하였다.

임병두 상병은 이우인을 사랑하는 모임인 가칭 “이사모”라고 하는 친목단체를 하나 만들어 군시절의 즐겁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되새겨 보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 당시 해운대 탄약창에는 나와 9명의 후임병이 있었는데 그중 현규라는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 이제 8명의 후임병이 남아 있는데 나는 이제 더 늦기전에 그 후임병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인생을 되돌아 보니 나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행복을 상징하는 세잎크로바는 널려있는데 그 참뜻도 모르고 오로지 행운을 뜻하는 네잎크로바만 찾으며 헤매온 인생이었다. 진정한 행복은 가까이 있고 소중한 추억들을 반추하는 것도 행복의 한 요소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