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워스워즈의 ‘초원의 빛’ 중에서

난 지금 가평에 살고 있다. 가평도 서울의 근교지만 지난 주말 어머니가 살고 있는 서울 근교 시골집에 다녀왔다. 시골이라 해봐야 서울에서 차로 1시간 이내에 다다를 수 있는 경기도의 작은 마을이다.

지금은 서울의 위성도시가 되어 마을이름도 리에서 동으로 바뀌고 주민수도 많이 늘었지만 내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60~70년대만 해도 마을에는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신작로에 먼지만 폴폴 일던 벽촌이었다.

그 당시 마을 어귀에는 장관집이라 불리던 별장이 하나 있었는데 자유당시절인가 공화당시절 장관을 지낸 분의 것이라 했다. 그러나 장관은 이미 고인이 되고 그 아들들이 그 당시 주말이면 가끔씩 가족과 함께 내려와 하루 밤을 지내고 서울로 올라 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 별장은 약 4천평 정도의 밭과 2만평 정도의 야산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별장 본체, 옆에 부속 가옥 1채 그리고 창고로 구성 되어있었다.

부속가옥에는 그 별장을 관리하는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관리인 농부가 아버지 친구분 이었다. 관리인 아저씨는 농한기에도 아버지를 불러 별장 주변 약 2천평정도에 심어져 있는 정원수의 가지치기를 함께 하였고 농번기에도 약 2천평 정도에 딸기와 고추, 오이, 들깨를 심어 일손을 바삐 놀렸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우리집 식구들은 돈벌이가 드물었던 그시절 비싼 노임을 주고 매일 일거리를 마련해 주시는 아버지 친구분이 무척 고마웠다.

별장은 사유지로서 사방이 철조망으로 울타리 쳐졌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관리하였기 때문에 산에는 수목이 우거지고 주변에 비해 풍광이 빼어났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가 일하는 날이면 으레 아버지를 따라 그 별장을 드나들며 우리 집 인양 별장 주위에서 뛰놀고 별장 뒤 산을 누볐다. 별장 뒤 뜰 에는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맑은 물위에 금잉어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호수와 연결된 졸졸 물이 흐르는 조그만 도랑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별장 뒤 산으로 이어지는데 야 20여분 나지막한 산을 올라가면 산중턱의 숲속에 약 10평정도의 평평한 평지가 나왔다. 산중턱의 평지에서 별장을 내려다보면 별장 옆 채소밭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와 아저씨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난 여기 산중턱의 평지에 사방이 영감나무 넝쿨과 덤불로 둘러싸여 있어 누군가 일부러 숲속에 아지트라도 만들려고 했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방을 하나 발견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난 그곳의 한쪽 구석에 쉽게 드나들 수 있게 자그마하게 입구를 만들고 이장소를 ‘숲속의 방’이라 이름 붙였다. ‘숲속의 방’에 홀로 누워 하늘을 보면 지붕처럼 덥혀있는 넓게 퍼진 산벚꽃나무 가지위로 잔잔한 바람이 스치우고 그 잎사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바람이 불때마다 잎사귀 사이에서 눈부신 햇살이 일렁거렸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내가 ‘숲속의 방’에 누워 책을 일고 있을 때 어디선가 왁자지껄 소리가 들려왔다. 산아래를 내려다보니 별장에는 자가용 네다섯대가 보였고 한무리의 신사 숙녀들이 보였다.

파라솔이 펼쳐지고 고기굽는 냄새도 풍겨왔다. 딸기밭에서는 숙녀들이 딸기 따는 모습도 보였다. 아마 장관집 아들중의 한명이 친구들을 초청해 파티를 하는 듯했다. 한 두시간이 지났을 까. 누군가 산 중턱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파티를 끝낸 무리들이 그늘을 찾아 별장 뒷산으로 산보를 나선 듯했다. 그중에서 한 커플이 무리에서 이탈하여 내가 있는 ‘숲속의 방’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나 얼른 일어나 책을 들고 ‘숲속의 방’을 벗어나 덤불 뒤 풀숲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겼다. 그 도회풍의 선남선녀는 자기들이 바라는 장소라도 찾은 듯 ‘숲속의 방’에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잘 은폐되어 사랑이라도 나누기에 완성 맞춤인 듯 그 남자가 먼저 ‘연인들의 장소’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숙녀가 ‘맞아요’ 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당시 영화관에서는 훼이 더나웨이 주연의 ‘연인들의 장소’ 라는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내가 잠시 수풀에 고개를 쳐박고 있는 사이 이미 상아빛 뽀얀 두개의 수밀도는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융기되어 있었고 잠자리 날개 같이 하늘거리던 그녀의 스커트 자락에선 바닐라 향이 뿜어져 사방에 만개한 아카시 꽃 향과 어울어져 벌과 나비 그리고 숨죽이고 그 광경를 지켜보던 소년과 초목들 까지 모두 마비 시켜버렸다.

그리고 내가 성년이 되어 그 장소를 또 한번 찾아간적이 있었다. 내가 24세가 되던 해 영문학도 였던 난 ROTC 청년장교가 되어 전방으로 가기 전날 한 마을에 살던 첫사랑을 불렀다.

그리고 달빛이 어슴프레 비추던 밤 ‘숲속의 방’에서 사랑의 맹세를 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맹세가 깨지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시집간 후였다.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맹세는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만큼 맹세는 지켜지기가 어렵다는 뜻일까. 어머니를 뵙고 가평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별장앞을 가보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별장은 없어지고 그 자리엔 주유소가 들어섰고 산 중턱 ‘숲속의 방’이 있었던 그 자리엔 운동기구가 몇 개 설치되어 있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 갈수 없는 그시절, 젊음이 약동하던 그시절 , 세월의 부침속에 나의 추억도 매몰되어 가고 있었다.

가평군청 교육협력과 서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