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은 500년을 가고 한지(韓紙)는 천년을 간다‘는 옛말은 사실이었다. 지난 해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의궤‘는 우리 한지가 얼마나 강하고 우수한지를 만천하에 증명했다. 100년 만 지나도 으스러지는 서양 종이와는 달리 의궤속 한지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빛깔과 광택을 자랑하고 있었다.

2010년 부산의 천성산 관음사 사찰 목조불상에서 1100여년 가량된 고려인삼이 썩지 않은 것에 대해 인삼을 싸고 있는 한지에서 그 비밀을 찾았다.

천년 한지의 맥을 잇다 - 중요무형문화재 한지장, 장용훈 ‘지천년견오백’ 천 년을 견디는 전통한지 제작을 위한 일생의 노력!

장용훈 한지장은 1937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한학과 일본어에 능통했던 선친 장세권 씨(1900년생, 1966년 작고)와 함께 17살에 시작해 63년을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전통 한지만을 고집한 한지장(韓紙匠) 장용훈 옹.

일제시대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개량기법 '쌍발뜨기'가 도입이 되었지만, 오로지 전통 한지 제작기법인 '외발뜨기'만이 진정한 한지라 생각해온 장용훈 선생은 전북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마을에서 한지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6.25전쟁 이후 전주를 거쳐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서 전통한지 "청웅한지"를 만들다가 가평군 청평면 상천리로 공장을 옮겨 지금까지 전통한지만을 전업으로 제작해 왔다.
 

6.25 전쟁으로 분실된 관공서 문서를 복원하기 위해 한지 수요가 급증해 할아버지와 부친이 열심히 한지를 제작해 집안 살림이 풍족했었다는 말을 부친으로부터 전해들었던 무형문화재 이수자 장성우 씨. 장용훈 한지장은 흘림뜨기 방식으로 한지를 만드는데, 흘림뜨기란 발 한쪽에 끈을 매단 후 발을 앞뒤 좌우로 뜨는 것으로 종이의 질을 높여주는 방식이다.

또한 전통한지를 고집하면서도 옛것에만 머물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 천연 염료를 사용한 색지와 각종 문양을 넣은 문양지 등 다양한 한지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맏아들에게 한지공예를 전승하고 있어 3대에 걸쳐 전통 한지공예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리고 1996년 12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6호, 2010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117호 한지장(韓紙匠) 보유자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예작가의 작품이나,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 모사 등에 쓰이는 것도 모두 장용훈 장인의 한지를 사용할 정도로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외발지.
 

전통기법 외발뜨기를 한 외발지, 개량기법인 쌍발뜨기를 이용한 쌍발지, 그리고 중국산 한지의 내구성을 과학적으로 비교하는 실험이 있었다.

중국산 한지는 9회 만에 끊어졌고, 쌍발지는 89회 만에 끊어졌지만, 우리 전통의 외발지는 무려 1269회를 견뎠다.

요즘은 실내 인테리어에도 접목되어 한지가 벽지, 붙박이장 등에 두루두루 사용되며, 한지로 도배한 집에선 아이의 아토피도 사라졌다고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여전히 전통방식 그대로 최고의 한지를 제작하고 있는 장용훈 한지장(중요무형문화제 117호)을 만나기 위해 청평에 위치한 공방을 찾았다. 올해 연세가 여든이신 한지장 장용훈 선생은 몸이 불편해 만나지 못하고 무형문화재 한지전수자로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한지 제작 23년 경력의 맏아들 장성우(47세)씨를 만났다.
 

한지장 장용훈 선생의 4남 1녀중 맏아들로 태어나 23년 전인 1990년 12월 27일 군대를 제대한 뒤 일 주일을 쉬었다가 부친이 하시던 한지 제작에 뛰어들었다는 장성우 씨는 정확히 일을 시작한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군대에 있는 동안 둘째와 막내 동생이 저 보다 먼저 부친 일을 도와 일을 시작했습니다. 또 저도 함께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4부자네 장지방으로 소문나기도 했지만 결국 저만 부친 곁에 남아 4대 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웃으면서 그 동안의 일을 전했다.
 

“처음에는 부친 일을 도와드린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고, 나중에는 힘든 일도 즐겁게 종이를 만들자, 사람들이 종이를 찾는 것이 바로 나를 찾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일을 해온 것이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그동안 부친으로부터 제대로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장성우 씨는 부친과 의견 충돌도 많았다고 한다.

“저는 기계를 이용하거나 편리한 방법을 제안하지만 전통만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반대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면서 “그래도 아버지가 동의한 것이 있으니 바로 물질을 할 통 바닥에 스텐레스 금속을 덧대 물질하는 통을 교체해야하는 번거로움을 없앤 것이나 닥나무 껍질을 보관하는 냉동고와 저온에서 온도가 낮을수록 풀성분이 잘 나오는 황촉규를 1년 365일 보관할 수 있음에 따라 항시 질 좋은 한지를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한지 제작과정
 

1)1년생 닥나무를 잘라 가마솥에 삶은 뒤 겉껍질을 벗겨낸다. 겉껍질을 제거한 속껍질을 ‘백닥’이라 한다. 2)백닥을 잿물에 넣고 장작불에 삶아낸 뒤 맑은 물에 헹궈낸다. 3)백닥에 섞여있는 불순물을 손으로 하나하나 골라낸다. 4)티를 골라낸 닥을 죽이 되도록 두드려 잘게 부순다. 5)지통에 잘게 부순 닥과 깨끗한 물을 넣고 잘 저어 풀어주면서 걸러낸 항촉규 점액을 넣고 다시 잘 저어준다. 6)발틀을 담갔다가 건지기를 반복, 앞뒤로 물을 흘리며 한지를 뜬다. 7)발을 떠서 건져낸 종이를 멍석위에 펴 말린다. 8)한지를 두드려 밀도를 높이는 ‘도침’ 작업을 해야 인쇄할 때 색이 번지지 않는다.

닥나무 잿물 물 황촉규. 한지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 네 가지.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 껍질은 11월~12월에 베어낸 1년생 닥나무에서, 그리고 잿물은 메밀대나 고춧대를 태워 만든 재에 물을 통과시켜 만든다. 닥나무 껍질을 이 잿물에 삶게 되는데 섬유 손상이 없는 깨끗한 닥섬유를 얻을 수 있다.
 

아들 장성우씨는 “한지 제작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이 잿물을 만들고 닥종이를 삶는 일”이라고 했다. 2~3주 걸리는 재료 준비과정을 거쳐 2~3일 동안 한지를 만든다고 한다. “요즈음은 이런 재료 준비 과정을 편리하게 동남아 값싼 공장에 맡기는 곳도 있다”며 “이렇게 해서는 질 좋은 한지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라고 강조한다.
 

황촉규(아욱과 한해살이 풀)는 흔히 ‘닥풀’이라고도 한다. 닥섬유를 깨끗한 물에 넣고 저을 때 이 닥풀을 함께 넣어 젓는데 닥풀에서 나오는 끈끈한 액체가 물속의 닥섬유를 고르게 분산되도록 하고 발로 한지를 뜰 때 물이 빠지는 속도를 조절해 종이의 두께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발로 물질을 해서 뜬 한지를 건조시키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이인 중성지 전통 한지가 완성된다.

장용훈 옹은 조부님이 작고하신 이후 지방을 떠나 부친이 홀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마석을 거쳐 청평으로 옯겼지만 몇 번의 물난리를 겪으면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금의 청평면 상천리 가평군 소유의 땅(27여평)에 정착해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군유지여서 제대로 건물신축이 불가능해 가건물과 임시 컨테이너 건물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로(93cm) x 세로(63cm) 크기의 한지를 월 5천~6천장 정도 생산하고 있다는 장성우씨는 “생산량의 15% 정도를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며 “일반 한지는 종로구 인사동 직매장에서 판매되고 이곳 장지방에서는 주문자 요청에 따라 별도의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한다”고 밝혔다.

한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한지를 꾸준히 개발해야 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지에 창살이나 대나무 무늬를 새긴 문양지, 닥나무 섬유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미상지, 표면이 오돌토돌한 요철지, 옻칠을 해 색을 입힌 옻칠지 등 다양한 형태의 한지를 개발해 만들고 있다.
 

60여년의 세월을 한지와 함께 한 한지장 장용훈 옹. 그리고 잘 뜨진 한지를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 힘닿는 날까지 좋은 한지를 뜨고 싶다는 부친의 바램을 이어가며 제2의 한지장을 꿈꾸는 장성우 씨에게도 지금의 현실이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우리가 한지 문화를 전수해 준 일본의 경우 ‘수백 년 이어져온 한지문화가 형성되어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희 집안이 4대 째 전통 한지 가업을 이어오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수백 년 이어온 한지 문화를 후세에 전하고 또 끊임없는 기술 개발을 통해 새로운 한지 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기반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현실을 지적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최소한 10년 주기로 새로운 인재가 발굴되어 한지 문화를 이끌어 가고 전수되어야 합니다”라며 “그런 여건을 지방 자치단체나 국가가 조성해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