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록한 허리

그 아래 비옥한 삼각주

(중략)

신은 이브에게 관능을 심어놓고

심약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필자의 자작시 『이브』의 일부

 

 그날따라 찌는 듯한 더위가 문제였다. 바람 한 점없는 일요일이었다. 35℃~40℃를 오르내리는 이상기온은 습하기 까지 하여 집안에서 더위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깊은 산속 어디론가 피서를 떠나고 싶었다. 캐나다에 온지 2주간 토론토 인근 브램턴, 미시사가, 옥빌을 다녀보았지만 어디에도 산은 보이지 않고 조그마한 언덕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대평원이었다. 나는 옥빌에 있는 민박집 교포 아주머니에게 차를 타고 얼마만큼 가면 시원한 계곡이 있느냐고 물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농담인줄 알았다.

그녀는 나를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갔다. 그러나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산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등산로 라는 조그만 안내판이 보였다.

나는 입구를 지나 홀로 그 길을 따라들어갔다. 평지에서 완만한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계곡을 내려가고 있었다. 옥빌에서의 등산은 평지에서 계곡 속으로 깊이 하산했다가 다시 평지로 올라오는 것이었는데 한국에서는 먼저 산에 올랐다가 나중에 하산하는 것과는 반대 개념이었다.

30분 정도 아래로 내려가니 협곡을 따라 폭이 약 10M정도 되는 작은 하천이 나타났다. 천변에는 숲이 우거져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쓰러져있기도 하고 썩어 고목이 된 곳도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어 배낭에 넣고 맨발로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수심이 얕아 무릎아래 종아리 까지 물이 적셨지만 하천바닥은 고운 모래여서 감촉이 아주 부드러웠다.

작은 송사리떼가 맑은 물속에서 은빛 비늘을 번쩍거리며 나와 숨박꼭질하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였다. 거기에서 30분 정도 상류 쪽으로 더 올라가니 하천이 휘어져 굽이쳐 가는 곳에 물웅덩이처럼 움푹패여 작은 소(沼)를 이루고 있었다.

그 소(沼)엔 폭염에 떨어진 능소화 꽃대롱이 소용돌이를 따라 무리지어 빙글빙글 돌고있었다. 수심이 허리까지 차 오를 정도로 꽤 깊었다. 한참동안 소(沼)에 몸을 담궜다. 뼈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더위를 식힌 나는 다시 옷을 입고 웅덩이 옆 잎사귀 무성한 아름드리 캐나다 오동나무에 올라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내가 읽고있는 책은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 」

 

한 두시간이 지났을까? 한 낮의 정적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쩌벅쩌벅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소리. 이 깊은 계곡에 누구일까? 그런데 황금색 머리의 아름다운 미녀가 배낭을 메고 오른쪽 팔로 아이를 가슴에 안고 옆에는 송아지만한 까만 개를 거느리고 물살을 가르며 상류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나무위의 독서를 그만두고 그녀의 행동거지를 숨죽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2살정도 되보이는 여자아이의 옷을 벗겨 건너편 천변 풀밭에 집어 던지고 자신도 훌훌 옷을 벗어버리고는 아이를 안고 방금전 내가 목욕을 했던 나무 그늘아래 작은 소(沼)로 돌진해 들어갔다.

더위에 지쳐 숨을 헐떡이던 큰 개는 하천 중간에서 주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나무위에서 그광경을 지켜보니 마치 큰 연어 한 마리가 새끼연어를 거느리고 힘차게 물살을 거스리며 상류로 올라오고 까만 북극곰이 그것을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동안 시원한 소(沼)에서 더위를 식힌 그녀가 아이를 안고 내가 위치한 건너편 풀밭으로 나와 돗자리를 깔고 아이를 앉혔다.

 

물기에 젖은 황금색 머리

붕긋솟은 가슴

개미 허리

그아래 비옥한 삼각주

 

그녀의 몸매는 결점하나 없어 보였다. 밝은 햇살아래 물을 뚝뚝흘리며 돗자리에 우뚝선 팔등신의 농익은 헤라,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눈부신 머리가 황금색으로 빛났고 그녀의 허리 아래 비옥한 삼각주에 질서 정연하게 자란 잔디조차 가을 들녘의 벼처럼 누런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내 마음은 황홀 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고통이었다. 이제 나의 욕망은 순수를 향해 가기보다는 악마처럼 뜨거운 격정속에 사로 잡힌다.

터질듯한 욕망은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뜨거운 태양아래 나는 드디어 이 이국 여성에게 불같은 키스를 퍼붓는다. 열정과 전율이 함께하고 찌릿한 감전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컹컹 개짖는 소리에 나는 환상에서 깨어난다. 개가 드디어 나무위에 있는 사람 냄새를 맡은 것일까. 계속해서 짖어대고 그녀가 무엇인가 확인 하려는 듯 발거벗은 몸으로 개천을 가로질러 오동나무아래로 다가와 나를 올려다 본다.

그녀가 나무위의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나는 그녀에게 몇마디 짧은 영어로 변명한다. 나는 당신이 도착하기 전부터 여기 나무위에 와 있었고 나는 당신을 훔쳐볼 의도가 전혀 없다고. 그러니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Innocent or guilty ? I am innocent’ 무죄냐 유죄냐? 나는 무죄다 .

그랬더니 그녀는 ‘알았다’(it's okey) 고 하면서 다시 건너편 그녀의 돗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참 희안하였다. 그녀가 이제 건너편 나무위에 낯선 남자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으면 옷을 입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온몸에 오일을 천천히 바르더니 돗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는 것 아닌가. 양 발을 몸쪽으로 끌어당겨 무릎의 각을 세우고 친절하게도 내가 보이는 정면으로 벌어진 콤파스의 폭을 더 넓히면서...

 

다음날 아침(월요일) 토론토 한국계 유학원장의 안내로 온타리오주 몇 개 대학을 견학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학생들의 방학기간동안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둘러보았다. 두 번째로 S대학에 갔을 때 였다. S대학의 영어어학당 안내를 맡은 교수가 바로 그녀가 아닌가. 그녀는 옥빌에 산다고 하였다.

나는 어제 그녀의 모습이 아른 거려 기분이 묘했지만 그녀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어학당 프로그램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대학 교문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기를 탑승 할때까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전율과 함께 옥빌 여인의 잔상이 길게 롱테이크 하였다.

 

※옥빌(oakville)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조그만 타운 이름이고 옥빌에 있는 씩스틴마일 크릭이라는 협곡에서의 경험을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