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회한(悔恨)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한때 열열히 사랑하였으나 비켜간 운명 때문에 헤어져야 했던 첫사랑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나의 불안이며 우수이고 고뇌이며 열정이다 .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긴세월 거친 세파에 찌들어 몸은 늙고 얼굴은 쪼글쪼글 해졌을까? 아니면 처녀때보다 더 곱고 우아한 귀부인이 되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 25세 청년장교였던 나는 화천에서 소대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그녀는 화천으로 두번 면회를 왔다.

한 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그해 4월 화사한 엷은 흰색 드레스를 입고 밝은 표정으로 첫면회를 왔다. 그녀와 함께 화천강변을 걷는데 살랑살랑 봄바람에 벚꽃잎이 눈처럼 머리위로 휘날려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것만 같았다.
 
면회가 끝나고 화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녀가 버스를 타고 서울로 떠난후 조차도 미래의 부푼 꿈으로 내 얼굴은 상기되어있었다.

그녀가 두 번째 면회 왔을때에는 화천강에 길게 산그림자가 드리워진 7월 어느 토요일이었다, 나는 야외 훈련을 마치고 적근산 부대에 복귀해 부랴부랴 몸을 씻고 화천으로 면회를 나오는데 무척 서둘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화천읍내 어느 음식점에서 쏘가리 매운탕을 끓여놓고 오후 내내 소주를 마셨다. 그녀가 나를 향해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순간 어딘지 불안한 표정이 배어있었다. 그녀가 불현 듯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 평생 나를 행복하게 해 줄수 있어?〝

나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가 다되었다. 서울 가는 시외버스 막차시간이 가까워왔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 서울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그런대 그녀가 하는 말,

〞오늘 나 자고 갈 꺼야〝

나는 가슴이 철렁했고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나는 신혼 첫날밤까지는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는 사이사이 욕망이 들불처럼 피어 올라도 나는 그 선만은 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몇 번의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대 그녀가 갑자기

〞만약 오늘 밤도 끝까지 나를 갖지 않는 다면 난 앞으로 내 몸이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어〝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그 말에 내가 그토록 아끼고 애지중지하던 고운 꽃봉오리를 꺾고 말았다. 그리고 첫 번이 어려웠지 그날 밤 세 번 더 우리는 땀으로 멱을 감았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나 그해 가을 나는 고향의 동생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그편지에는 내 첫사랑이 돈 많은 재미교포에게 시집갔다고 적혀있었다. 그녀가 두 번째 면회 왔을 때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겠네」

박재삼의 시「울음이 타는 가을강」의 일부

나는 반은 실성한 사람이 되어 그해 가을 화천강변에 나와 회한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 청춘은 빛이 바랬고 첫사랑을 향한 순수도 퇴색해버렸다. 쌓였던 그리움과 그녀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버렸다. 어느 수필가가 「인연」이라는 수필에서 말했었다.

세 번째 만남은 이루어지지 말았어야 한다고. 다행히 나는 그녀가 결혼 한후 아직 한번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화천강에 대한 추억을 뒤로하고 화천에서 가평으로 돌아오는 길 지암리 고개를 넘어 홍적리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석양이 내 차장 깊숙히 투사되어 들어왔다. 나는 다시 강력한 생활인의 자세로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