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사건을 회상해 본다. 첫직장, 26세 신입사원 시절 나는 구내식당 영양사 여직원에게 마음이 홀려있었다.

서울 모여자대학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나보다 2~3년 먼저 입사했다고 들었다. 얼굴이 오목조목하고 자그만 일에도 수줍어하고 선이 가는 동양미인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와 결혼하면 얼마나 행복 할까? 상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볼 수 있는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고 데이트 신청을 한번 해보리라 마음 먹었다.

결국 어느날 오후 한가한 시간에 건물 옥상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주말에 뭘하고 지내는지?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그녀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퇴근후 집에가서도 그녀의 다소곳한 모습이 눈에 어른 거렸다.

그후 그녀와 회사에서 마주치면 다정한 눈길을 주고 받고 만날수록 그녀에 대한 생각이 깊어 갔다. 여러차례 영화구경을 같이 하고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는 사이 1년이 흘렀다. 그녀가 예뻐서 인지 아니면 요조숙녀이기 때문인지 여섯명의 ROTC 입사 동기생들 모두 그녀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해 11월 하순 나는 관리부 동기생 P와 단둘이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그 P에게 갑자기 한방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당시 친구P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 그자체였다.
 

『지난주말 구내식당 영양사와 데이트를 했어, 경춘선 열차를 타고 춘천에 갔어.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줍어함은 사라지고 썬글라스를 끼고 머리를 길게 풀어제치고 검정 자켓과 몸에 딱 달라붙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007 본드걸을 연상시켰어.

그녀가 그 복장으로 청량리 역에 나타났을때 난 그녀를 몰라 볼뻔 했지, 만나자 마자 내 팔장을 끼고 기차의 플래트홈을 밟더라. 기차가 가을 걷이를 끝낸 들판을 달리자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옆에 앉은 나를 쳐다보고 살포시 내품에 안기며 지긋이 눈을 감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어.

첫 만남에서 우리는 벌써 연인이 된 기분이었지. 기차가 구리, 남양주, 마석, 청평, 가평 그리고 강촌을 지나 춘천에 도착했어. 소양댐을 대충보고 돌아와 춘천의 명동과 공지촌을 둘러보고.... 늦가을 비까지 내리니 춥고 을씨년스러워 우리는 점심으로 닭갈비에 소주 그리고 메밀국수를 먹고 몸을 따뜻하게 뎁혔지.

그리고 춘천투어의 백미는 내가 결국 그녀의 심연(深淵)을 보고 말았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 아담한 호텔에 들어갔어. 오후의 호텔은 아주 고요해,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니 창밖에 빗방울 듣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뿐! 이세상에 우리 둘만이 있는 느낌이야.

어느 작가가 노처녀를 가리켜 장대 끝을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밤알이 기다렸다는 듯 우두두 쏟아지는 ‘시월의 밤송이’ 라고 하였는데 나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야. 그녀가 30년간 지켜온 소중한 것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는데 아주 엄숙하고 진지하더군.

처음엔 고통의 의성어, 중간엔 끼~윽 끼~윽 거위의 울음소리 나중엔 연하의 나를 두고 오빠 오빠라고 부르며 좀처럼 포옹를 풀려고 하질 않아. 그리고 그 표정은 사뭇 처연하고 비장하기 까지 해.

한 두시간이 지난후 두 번째, 이제 그녀는 원시성을 회복하고 태초의 의성어, 태고의 몸짓, 심지어 헛소리까지 하는데 적응 속도가 굉장히 빨라. 한동안 널브러진 몸을 추스릴 생각도 없이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데 넋이 나간 사람같았어. 아낌없이 주고 아낌없이 받았지』
 

나는 그이야기를 들은 다음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점심 시간 전에 회사 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한창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에게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눈짓 몸짓 다정해도 믿을수 없어요

달이가면 변할 줄 알았으니까.

웃는 얼굴 다정해도 믿을 수없어요

해가 가면 변할 줄 알았으니까」윤복희의 노래 웃는 얼굴 다정해도 일부

가면을 쓰고 있는 그녀 얼굴이 역겨웠다.

가슴에 뜨거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