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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일과가 끝나자마자 약속한 소공동 반도조선 아케이드 커피숍「다빈치」에서 그녀(구내식당 영양사 미스신)를 만났다.
그녀는 갈색 버버리 코트의 깃을 세우고 더 우아하고 성숙해보였다. 실망이 크며 앞으로는 서로 아는체 하지 말라고 절교를 선언해 버렸다. 그리고 친구 P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하고 무언가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난 그 자리를 떠났다. 그후 회사에서 그녀와 몇 번 마주쳤지만 그녀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
그후 1년의 시간이 또 흘렀다. 친구 P가 사내 ROTC 동기생 모임에서 결혼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청첩장을 하나씩 나눠주는데 신부가 당연히 영양사 미스신인줄 알았는데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 날 모임이 끝나고 2차로 친구 P와 단둘이 무교동에 있는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친구에게 따졌다. 「 야! 너 영양사 미스신과 결혼하는 것 아니었어. 처녀를 건드렸으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냐?」그의 대답은 황당했다.
「 연애한번 했다고 결혼까지 해야하니? 나는 노처녀가 불쌍해서 머리 한번 올려준 것 뿐이야. 내가 봉사했으니까 오희려 그녀가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냐?」나는 뻔뻔스러운 그의 얼굴을 한방 갈겨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친구에게 점잖게 한마디 던졌다. 「넌 어디까지가 진심이냐. 인생 그렇게 살지마라!」그리고 혼자서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함초롬한 그녀의 모습이 눈에 어른 거렸다.
무교동에서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해방촌, 이태원 그리고 잠수교를 지나 1시간 이상 골똘히 생각하며 반포의 집까지 걸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뭔가 위로의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구내식당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지만 이미 5일전에 사표를 내고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와 절친했던 경리과 여직원을 통해 그녀의 주소로 가까스로 알아내 아르바이트 한다는 장소로 찾아갔다. 그날 밤 나와 그녀는 저녁식사를 하고 장소를 옮겨가며 많은 술을 마셨는데 무교동 「티파니」에서 발렌타인21년 산 한 병을 거의 다 비웠다.
취중진담이라고 그녀는 나의 우유부단함보다는 P의 용기와 박력, 남성미에 이끌려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의 배신행위에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흐느꼈다.
자정이 다되었다. 그녀를 바래다 주기로 마음 먹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살고 있는 개포동 주공 2단지로 갔다. 그녀의 본가는 제주도였는데 대학시절부터 이 소형 아파트에 전세로 혼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어깨동무하여 힘겹게 그녀 아파트 현관가지 다다랐다. 손끝에서는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데도 물컹한 가슴이 부드럽게 진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팔이 내 목덜미를 끌어당겨 침대위에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뜨거운 뺨에 얼굴을 맞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발렌타인 21의 부드러운 향취와 뜨거운 입김, 그리고 ‘너무 늦었어요. 자고가요’를 읊조렸다.
하얀 시트위에 풍성한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더욱더 관능적으로 보였다. 단숨에 하복부가 뻐근해져옴을 느꼈다. 해부학 시간, 우리의 신체에서 혀만큼 부드러운 기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녀와 나는 왜 처음부터 이러지 못했을까. 갈망과 회한 그리고 북받쳐오르는 설움을 꾹 참았다. 몽롱한 취기에서 나는 이것이 동정인지 사랑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가 이미 등정한 봉우리를 다시 오르는 것은 의미도 없고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녀가 말했듯이 우유부단이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아니던가? 시원한 밤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 2016년 12월 10일 송년회에는 친구P 와 제주도에 살고있는 영양사 미스신도 34년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친구P : 대기업 사장 딸과 결혼해 2남을 두었으며 지금은 4개의 중견기업을 거느린 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영양사 미스신 : 그후 고향 제주로 낙향하여 제주 목장주 아들과 결혼해 50만평의 목장주 사모님이 되었다.
그녀는 2남 1녀를 두었고 이미 손자 손녀 그리고 외손자도 보았 다고 자랑했는데 서울 사는 손자 손녀 그리고 외손자를 보러 서울 나들이도 가끔 한 다고 하였다.
필자 : 1남 1녀를 두었으며 현실에 순응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 3인의 청춘극장은 이렇게 진행 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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